포욱(鮑昱, ?~81년)은 후한 초기의 관료이자 정치가로, 자는 원중(元仲)이며 상당군(上黨郡) 둔류현(屯留縣) 출신이다. 그는 전한 말기의 강직한 신하였던 포선(鮑宣)의 손자이자, 후한의 개국 공신 중 한 명인 포영(鮑永)의 아들이다. 가문의 학풍인 유학과 법률에 정통하였으며, 부친의 뒤를 이어 조정에 출사하여 가문의 명성을 이어갔다.
명제(明帝) 재위 기간 중 그는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임명되어 지방 행정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후 중앙으로 불려 올라와 상서령(尙書令)을 거쳐 정위(廷尉)에 임명되었는데, 정위는 오늘날의 대법원장이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사법의 수장이다. 그는 법을 집행함에 있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정함을 유지하였으며, 특히 가혹한 형벌을 경계하고 법의 근본 정신을 살려 판결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당시 명제는 법 집행을 매우 엄격하게 하여 종친이나 권세가들도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는데, 포욱은 이러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억울하게 연루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楚왕 유영(劉英)의 반란 사건과 관련된 수많은 혐의자를 심문할 때,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정황상 참작할 만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유교적 덕치와 법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로 평가받았다.
장제(章帝)가 즉위한 후에도 포욱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건초(建初) 연간에 사도(司徒)를 거쳐 대위(大尉)에 올랐다. 대위는 삼공(三公)의 하나로 군사와 행정 전반을 아우르는 최고위직이다. 그는 조정의 원로로서 황제에게 국가 운영의 기틀을 조언하였으며, 가문의 전통인 청렴함과 강직함을 잃지 않아 관료들의 귀감이 되었다.
포욱은 81년(건초 6년) 대위로 재직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평생을 공직에 몸담으며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재산을 축적하지 않아 청백리로 칭송받았다. 그의 가문은 포선, 포영, 포욱에 이르기까지 3대가 모두 강직한 성품과 공정한 법 집행으로 이름을 날려, 후대 역사서인 《후한서》 등에 그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