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룬은 슬라브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닌 주신이자 천둥과 번개의 신이다. 인도유럽어족의 신화적 전통에서 제우스나 토르와 비견되는 존재로, 하늘과 비, 그리고 전쟁을 관장하는 인격신으로 숭배받았다. 그의 이름은 '치다' 또는 '타격하다'라는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그가 다스리는 벼락의 위력을 상징한다. 슬라브인들에게 페룬은 질서를 수호하고 악의 세력을 징벌하는 정의로운 전사이자 입법자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페룬의 형상은 대개 구리색 수염을 기른 건장한 남성으로 묘사되며, 그의 무기는 도끼나 망치, 또는 번갯불로 만들어진 화살이다. 그는 거대한 참나무를 신성시하며, 세계수의 꼭대기에 거주하며 지상의 질서를 감시한다고 믿어졌다. 독수리는 그의 전령이자 상징적인 동물로 여겨졌으며, 고대 슬라브인들은 천둥이 칠 때 페룬이 하늘에서 전차를 타고 달리며 악한 정령들을 사냥한다고 생각했다.
슬라브 신화의 핵심적인 서사 중 하나는 페룬과 지하 세계의 신인 벨레스 사이의 영원한 대립이다. 벨레스는 뱀이나 용의 형상으로 나타나 페룬의 가축이나 가족을 훔치려 시도하며, 이에 분노한 페룬이 번개를 내리쳐 벨레스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폭풍우가 발생한다. 이들의 갈등은 단순한 선악의 대결을 넘어 하늘과 땅, 산과 물이라는 이원적 세계관의 조화를 상징하며, 비를 내려 대지를 적시는 생명 순환의 원동력으로 해석되었다.
역사적으로 페룬 숭배는 키예프 루스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980년 블라디미르 1세는 페룬을 국가의 최고신으로 격상시키고 키예프 언덕에 은색 머리와 황금 수염을 가진 페룬의 신상을 세웠다. 그러나 988년 루스의 그리스도교 국교화 과정에서 페룬의 신상은 파괴되어 드네프르 강에 던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신앙 속에서 페룬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불의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현대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페룬은 고대 슬라브 사회에서 단순한 신앙의 대상을 넘어 사회적 결속과 군사적 맹세의 중심이었다. 전사들은 전투에 임하기 전 페룬의 이름으로 승리를 기원했으며, 조약을 체결할 때도 그의 처벌을 두려워하며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오늘날에도 동유럽 전역의 지명이나 식물 이름, 그리고 민속 명절 속에 페룬과 관련된 상징들이 여전히 보존되어 있어 슬라브 문화권의 정신적 뿌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