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리지파

카와리지파(Khawarij)는 이슬람 초기 역사에서 발생한 최초의 종파로, '나간 자들' 혹은 '탈퇴한 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7세기 중반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무아위야 1세 사이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본래 알리의 지지자들이었으나, 657년 시핀 전투에서 알리가 무아위야 측의 중재안을 수용한 것에 반발하여 그의 진영에서 이탈함으로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들의 핵심 사상은 "판결은 오직 하나님(알라)에게만 있다"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카와리지파는 인간이 신의 권위를 대신하여 정치적 협상이나 중재를 하는 행위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원칙주의는 칼리파 선정 방식에도 적용되어, 칼리파가 반드시 쿠라이시 부족 출신이거나 예언자의 혈통일 필요는 없으며, 가장 경건하고 도덕적인 무슬림이라면 노예나 흑인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카와리지파는 신앙을 행위와 동일시하였으며, '타크피르(Takfir)' 개념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이들은 중죄를 저지른 무슬림은 더 이상 신자가 아니며 배교자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교리는 자신들의 신학적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다른 무슬림들을 이교도로 규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호전성은 이슬람 공동체 내부에 큰 혼란을 야기했으며, 661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암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카와리지파는 여러 분파로 분열되었다. 가장 과격했던 아즈라크파와 같은 세력은 지속적인 반란과 탄압 속에서 소멸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이바디파(Ibadi)는 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바디파는 타 종파에 대한 관용을 강조하며 발전하였으며, 현재 오만의 주류 종파이자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초기 카와리지파의 과격성이 시간이 지나며 제도화되고 순화된 사례로 평가받는다.

카와리지파의 등장은 이슬람 내 신학적 논쟁과 정치적 분열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들의 극단적인 평등주의와 원칙주의는 후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 영감을 주기도 하였으나, 대다수 무슬림은 이들을 공동체의 통합을 해치는 극단주의 집단으로 인식해 왔다. 오늘날에도 이슬람 세계에서 '카와리지'라는 용어는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극단주의 세력을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