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마녀재판은 중세 말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그중에서도 1782년 스위스 글라루스주에서 집행된 안나 괼디(Anna Göldi)의 재판은 유럽 공식 기록상 마지막 마녀재판으로 평가받는다. 이미 이성과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확산되던 시기에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유럽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사법 체계의 잔인함과 개인의 권력 남용이 결합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사건의 발단은 안나 괼디가 의사 출신이자 정치가인 요한 야코프 추디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디는 자신의 어린 딸이 마시는 우유와 차에서 바늘이 발견되자 이를 안나 괼디의 소행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괼디가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아이의 몸속에 바늘을 집어넣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지역 사회의 유력 인사였던 추디의 영향력 아래에서 안나 괼디는 적절한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재판 과정에서 안나 괼디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거듭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신이 악마와 결탁하여 아이를 저주했다는 강요된 자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법정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판결문에 '마녀'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대신, '독살범'이라는 죄목을 씌워 사형을 선고했다. 1782년 6월 13일, 안나 괼디는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이는 유럽에서 사법 기관이 주도한 마지막 마녀 처형으로 기록되었다.
안나 괼디의 처형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 아우구스트 루트비히 폰 슐뢰처는 이 사건을 두고 이성의 시대에 벌어진 '사법적 살인'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러한 외부의 비판과 시대적 흐름은 이후 마녀재판이라는 폐습이 법제도 내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인권과 공정한 재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사건 발생 226년이 지난 2008년, 스위스 글라루스주 의회는 안나 괼디에 대한 무죄를 공식 선고하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주 정부는 당시 재판이 종교적 광신과 권력층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부당한 판결이었음을 인정했다. 현재 스위스에는 안나 괼디 박물관이 설립되어 그녀의 희생을 기리고 있으며, 이 사건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낙인찍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