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방(青幇)은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시기에 걸쳐 형성된 비밀결사 조직이다. 본래 대운하를 통해 물자를 운반하던 선부(船夫)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상호 부조를 위해 결성한 '안청복파(安淸復覇)'에서 유래하였다. 이들은 엄격한 입단 의식과 항렬에 기반한 위계질서를 갖추고 있었으며, 점차 단순한 노동자 집단을 넘어 경제와 정치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상하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중국 근대사의 이면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 청방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말 개항기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 군대와 상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인천과 서울 등지에 화교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본토의 청방 조직원들이 흘러 들어오거나, 현지 화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이권을 지키기 위해 청방의 조직 체계를 모방한 단체들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주로 인천의 화교 조계지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중국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신규 유입되는 화교들의 정착을 돕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방은 화교 사회 내부에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거나 분쟁을 조정하는 등 실질적인 자치 기구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숙박업, 음식업, 무역업 등 화교들이 주로 종사하던 산업 전반에 걸쳐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으며, 이는 화교 경제가 한반도 내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의 폐쇄성과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해 범죄 조직화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도박장 운영이나 밀수, 아편 거래 등 불법적인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이는 당시 조선 사회와 일제 당국에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청방은 일본 경찰의 엄격한 감시 속에서도 지하 조직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했다. 일부 조직원들은 중국 본토의 항일 운동이나 국민당 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하기도 했으나, 대다수는 화교 사회의 내부 결속과 생존에 집중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통제가 극심해지고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화교들의 경제 활동이 위축되자 청방의 세력도 점차 약화되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전쟁을 거치며 화교 사회가 재편되자, 전통적인 형태의 청방 조직은 점차 사라지거나 현대적인 형태의 화교 협회 등으로 흡수되며 그 자취를 감추었다.
역사적으로 청방은 한국 화교사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로 평가받는다. 이는 단순히 외래 범죄 조직의 유입이라는 측면을 넘어, 이주민들이 낯선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구축했던 사회적 안전망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명암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한중 관계의 부침 속에서 화교 사회가 겪었던 갈등과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청방의 활동상은 중요한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