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공(曺希公, 1572년 ~ 1630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임(子任), 호는 청음(淸陰)이다. 조선 광해군 대에서 대사헌, 부제학 등을 지냈다. 그는 특히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인조반정에 참여했다.
조희공은 경상남도 창녕 출신으로, 중종 대에 활약했던 조광조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매진해 세자시강원 문학에 임명되었고, 병조 참판과 예조 판서를 역임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청음집'이 있으며, 이는 그의 시문과 산문을 모은 것이다.
조희공은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그는 외교 문제에서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명분을 중시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는 외교와 관련된 여러 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며 논란이 되었으나,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문인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조희공의 학문과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희공은 163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경상남도 창녕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