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백(鄭判白, 1453~1504)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계수(季粹)이다. 세종 대의 명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麟趾)의 손자이며, 정소(鄭沼)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 학문적 토대를 닦았으며 성종과 연산군 대에 걸쳐 중앙 정계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1477년(성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등 주요 언관직을 두루 거치며 왕권 견제와 유교적 정치 원리의 구현에 힘썼다. 성종의 신임이 두터워 승정원의 승지에 임명되었으며, 국왕의 측근에서 정무를 보좌하며 국정 전반에 참여하였다.
그는 행정 실무뿐만 아니라 학문적 소양 또한 깊어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유학 교육과 후진 양성에 기여하였다. 이후 이조참판에 올라 관리의 임용과 인사 행정을 담당하며 조정의 기강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성품이 강직하고 소신이 뚜렷하여 맡은 바 소임을 다한 관료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연산군 대의 급격한 정치 변화 속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하자, 과거 폐비 논의 과정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연루되었다. 이로 인해 유배된 뒤 결국 처형되었으며 가산이 적몰되는 등 가문에 큰 화가 미쳤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신원(伸寃)되었다. 조정은 정판백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억울함을 씻어주어 명예를 복구시켰다. 정판백은 조선 전기 훈구파 가문의 배경을 가졌으면서도 관료로서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격동의 시기에 정치적 희생양이 된 인물로 역계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