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공

정양공(定陽公)은 고려 말기의 왕족이자 조선 초기의 인물로, 본관은 개성, 성은 왕(王), 이름은 우(禹)이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국왕인 공양왕의 친동생이며, 고려 신종의 7대손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왕조 교체기의 격변 속에서 고려 왕실의 후예로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직후, 태조는 고려 왕씨들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과 회유책을 동시에 병행하였다. 당시 대다수의 왕씨 종친들은 거제도와 강화도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는 비극을 겪었으나, 왕우는 예외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예우를 받았다. 이는 그가 조선의 건국 세력과 긴밀한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우의 장녀는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 이방번과 혼인하였으며, 차녀는 이성계의 조카인 이천우의 부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사돈 관계 덕분에 왕우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양군(定陽君)에 봉해졌으며, 왕씨 성을 유지하며 개경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또한 조선 조정으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아 생활의 안정을 보장받았다.

태조는 왕우에게 고려 역대 국왕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왕우는 경기도 마전(현재의 연천)에 세워진 숭의전에서 고려의 시조 태조를 비롯한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주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는 조선 왕조가 전 왕조에 대한 예우를 갖춤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조치였다.

왕우는 1397년(태조 6년)에 사망하였으며, 사후에 정양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식사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정양공 왕우는 고려 왕조의 맥을 잇는 동시에 조선 왕조의 포용 정책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