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 피에르(Pierre l'Ermite, 1050년경~1115년)는 제1차 십자군 운동의 핵심적인 선동가이자 민중 십자군의 지도자였다. 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성직자로 알려진 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성지 탈환 호소를 민중에게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귀를 타고 다니며 고행자 같은 모습으로 유럽 전역을 누빈 그는 탁월한 웅변술을 통해 수만 명의 하층민과 가난한 기사들을 결집시켰다.
그는 정식 기사단이 조직되기도 전에 '민중 십자군'이라 불리는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무리는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농민, 여성,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보급품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피에르는 이들을 이끌고 프랑스를 출발해 독일과 헝가리를 거치며 동쪽으로 행군했다. 이동 과정에서 이들은 식량 조달을 위해 현지 주민과 마찰을 빚거나 유대인을 박해하는 등 통제되지 않는 폭력성을 보이기도 했다.
민중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의 무질서함에 우려를 표하며 소아시아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니케아 인근에서 셀주크 튀르크 군대의 매복에 걸려 사실상 궤멸당했다. 이를 '키보토스 전투'라 하며,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민중 십자군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려 나갔다. 피에르는 당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고 있었기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민중 십자군의 참패 이후 피에르는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을 데리고 본진인 영주 십자군에 합류했다. 그는 십자군 내에서 여전히 영적인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안티오크 공성전 당시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기가 저하된 병사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1099년 예루살렘 정복 직전에는 성벽 주변을 도는 종교 행렬을 주도하며 십자군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성지 탈환이 성공한 후, 피에르는 유럽으로 돌아가 벨기에 위이(Huy) 인근에 뇌프무스티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1115년 사망할 때까지 수도 생활을 지속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비록 군사적인 전문성은 부족했으나, 중세 유럽 민중의 종교적 열망을 폭발적으로 끌어내어 대규모 원정을 가능하게 했던 상징적인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