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는 독일 관념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철학자로, 이마누엘 칸트의 비판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독창적으로 변용하여 헤겔에 이르는 가교를 놓았다. 작센 선제후국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예나 대학교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792년 칸트의 철학적 입장을 옹호한 '모든 계시의 비판'을 출판하며 철학적 명성을 얻었다. 이 저술은 처음에 칸트의 저작으로 오해받을 만큼 칸트 철학에 정통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후 그는 예나 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피히테 철학의 중심 개념은 '지식학(Wissenschaftslehre)'으로, 이는 모든 지식의 근거를 하나의 절대적인 원리에서 도출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칸트가 남겨둔 '물자체'라는 불가지론적 요소를 제거하고, 세계의 모든 근거를 자아(Ich)의 자기 정립 활동에서 찾았다. 그에게 자아는 외부 세계에 의해 규정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정립하고 동시에 자신과 대립하는 비아(Nicht-Ich)를 설정함으로써 세계를 구성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은 인간의 자유와 실천적 의지를 철학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은 실천 이성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피히테는 인간의 본질이 이론적 인식보다는 도덕적 실천에 있다고 보았으며, 자아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비아의 제약을 극복하고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에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공감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했으나, 점차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특히 '폐쇄 상업 국가론'에서는 국가가 시민의 경제적 자립과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경제 활동을 통제해야 한다는 초기 사회주의적 경향의 국가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피히테는 독일 민족주의의 선구자적 면모를 보였다.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그는 베를린 강연을 통해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독일 민족의 도덕적 재생과 교육 개혁을 역설하며 민족적 자각을 촉구했다. 그는 독일 민족이 인류 문명의 정신적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사상은 이후 독일의 근대 민족 국가 형성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1810년 피히테는 새로 설립된 베를린 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대학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중 병사들을 간호하던 아내에게서 발진티푸스가 전염되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철학은 셸링과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의 전개 과정에서 주체성과 자유의 문제를 심화시킨 중요한 지점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의 실천 중심적 사고는 훗날 유물론적 변증법과 실존주의 철학의 형성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