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환(安世桓, 1887년 ~ 1926년)은 일제강점기 당시 활약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기독교계 인물로서 3·1 운동의 계획 및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으며, 이후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평생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19년 3·1 운동이 기획되던 시기, 안세환은 기독교계 측 핵심 인물인 이승훈(李昇薰) 등과 긴밀히 교섭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에 직접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으나, 기독교계와 천도교계가 연합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데 있어 실무적인 연락과 기획을 맡아보았다. 특히 1919년 2월에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재일 한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준비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국내 민족 지도자들에게 전달하여 3·1 운동이 본격적으로 점화되는 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3·1 운동 당일인 1919년 3월 1일을 앞두고, 안세환은 민족대표들의 결의에 따라 일본 정부와 의회에 조선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다시 일본으로 밀파되었다. 그는 도쿄에 도착하여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과 귀족원, 그리고 주요 정부 대신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통고서를 발송 및 제출하는 등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일본의 심장부에서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국내로 압송되어 3·1 운동의 핵심 주동자들과 함께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 결과 안세환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수감 기간 동안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과 열악한 감옥 환경으로 인해 심각한 폐병을 얻었으며, 병보석으로 가출옥한 이후에도 온전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투병 생활 끝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6년 3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