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당쟁은 중국 북송 시기인 11세기 후반,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둘러싸고 개혁파인 신법당과 보수파인 구법당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정치적 대립을 일컫는다. 북송은 건국 초기부터 문치주의를 표방하며 관료 조직이 비대해졌고, 요나라와 서하 등 이민족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종(神宗)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대대적인 국정 개혁을 단행했다.
왕안석이 추진한 신법은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주로 농민과 소상인을 보호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농가에 저리로 영농 자금을 빌려주는 청묘법(靑苗法),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면역전(免役錢)을 내게 하는 모역법(募役法), 물가 조절과 유통 원활화를 위한 균수법(均輸法)과 시역법(市役法) 등이 있었다. 또한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보갑법(保甲法)과 보마법(保馬法)을 시행하여 민간의 국방 참여를 유도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사마광을 영수로 하는 구법당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구법당에는 구양수, 소식(소동파)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신법이 국가의 통제를 지나치게 강화하여 민간의 경제 활동을 위축시키고, 기존의 사회 질서를 뒤흔든다고 비판했다. 특히 개혁 추진 과정에서 하급 관리들이 실적을 쌓기 위해 농민들에게 강제로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수취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구법당은 이를 근거로 신법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신구당쟁은 황제의 교체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권력이 이동하며 장기간 지속되었다. 신종 사후 철종이 즉위하고 고태후가 섭정을 맡자 사마광이 재상에 기용되어 신법을 전면 폐지하는 '원우지치(元祐之治)' 시기가 도래했다. 그러나 고태후 사후 친정을 시작한 철종이 다시 신법을 부활시키면서 신법당이 권력을 잡았고, 이후 휘종 대에 이르기까지 양측은 상대 진영을 가혹하게 탄압하며 보복 정치를 이어갔다.
이와 같은 극한의 당쟁은 북송의 국력을 급격히 소진시켰다.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보다는 당파의 이익과 상대방에 대한 배척이 우선시되었고, 이 과정에서 채경과 같은 간신들이 득세하며 정치는 극도로 부패했다. 결국 내부 분열로 인해 국방력이 약화된 북송은 이민족인 금나라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는 1127년 정강의 변을 거쳐 북송이 멸망하게 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