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호타이 사건(적보대 사건)은 1868년 일본 보신 전쟁 초기에 발생한 비극적인 정치적 숙청 사건이다. 적보대(세키호타이)는 메이지 유신 초기 왕정복고를 지지하며 결성된 민간 의용군 성격의 부대로, 사가라 소조를 대장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이들은 신정부군의 선봉대 역할을 자처하며 에도를 향해 진군하였고,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신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들이 내세운 '연공 절반 감면(납세액 50% 감면)' 공약이었다. 적보대는 신정부의 핵심 인사들로부터 포고를 허가받았다고 믿고, 천황의 군대가 승리하면 농민들의 무거운 세금 부담을 절반으로 줄여줄 것이라는 약속을 퍼뜨렸다. 이 파격적인 공약은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 하에서 고통받던 농민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신정부군이 큰 저항 없이 진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전황이 신정부군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재정적 압박이 심해지자, 신정부 지도부는 세금 감면 약속을 이행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깨달았다. 만약 이 공약을 철회할 경우 발생할 민중의 분노를 두려워한 신정부는 적보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로 결정했다. 신정부는 적보대가 허가 없이 가짜 정보를 유포하며 관리를 사칭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들을 '위관(가짜 관리)'으로 규정하고 토벌령을 내렸다.
1868년 3월, 사가라 소조를 비롯한 적보대의 주요 간부들은 시모스와 숙소에서 신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들은 제대로 된 재판 절차도 거치지 못한 채 '관군을 사칭해 민심을 현혹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으며, 사가라 소조의 목은 효수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어제의 동료였던 신정부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후, 약속 이행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적보대를 범죄 집단으로 몰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신정부의 정당성을 위해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왔으나, 시간이 흐르며 메이지 정부의 기만적인 초기 집권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재조명되었다. 처형된 사가라 소조와 대원들은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28년에 이르러서야 명예가 회복되어 관직이 추증되었다. 세키호타이 사건은 일본 근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민초들의 헌신을 이용하고 배신한 대표적인 비극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