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왕후(成平王后)는 고려 제21대 국왕 희종(熙宗)의 정비이다.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종실인 영인후(寧仁侯) 왕진(王鎭)이고 어머니는 명종의 딸인 연수희궁주(延壽喜宮主)이다. 고려 왕실의 족내혼 관습에 따라 왕실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임씨(任氏)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녀는 희종이 태자로 재임하던 시절 태자비로 책봉되었다. 1204년 희종이 즉위함에 따라 왕후가 되었으며, 함평궁주(咸平宮主)라는 호를 받았다. 성평왕후는 희종과의 사이에서 창락궁주 등 5남 5녀를 두어 고려의 왕비 중 비교적 많은 자녀를 생산한 편에 속한다. 장남은 장차 태자로 책봉되는 왕숙(王淑)이며, 딸들은 대부분 왕실 종친이나 유력 가문과 혼인하였다.
성평왕후의 삶은 당시 무신 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희종은 최충헌을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1211년 최충헌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했다. 남편인 희종이 폐위되자 성평왕후 역시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궁궐 밖으로 쫓겨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폐위된 후 성평왕후는 희종을 따라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이후에도 교동도와 자연도 등 여러 유배지를 전전하며 고난의 시기를 보냈다. 1237년 희종이 법천사에서 승하한 뒤에도 오랫동안 생존하였다. 그녀는 고종 34년인 1247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성평(成平)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능호는 소릉(紹陵)이다.
성평왕후는 고려 시대 왕실 종친 간의 혼인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녀의 생애는 무신 정권기 국왕의 권위가 약화되고 왕실 가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폐비가 되어 유배 생활을 겪었으나, 사후 왕후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장사 지내졌다는 점에서 고려 왕실의 일원으로 예우받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