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범(徐光範, 1859~1897)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개화파 정치인이다.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자는 성칠(聖七), 호는 위산(緯山)이다. 그는 급진 개화파의 핵심 인물로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서구의 근대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이루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서광범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수신사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을 방문하며 근대 문물을 처음 접하였다. 이후 보빙사(報聘使)의 부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서구의 발전된 제도와 기술을 목격하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그는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으며, 개화당의 일원으로서 정변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서광범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정변 성공 후 수립된 신정부에서 외무독판 겸 교육독판 등을 맡아 개혁을 주도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급 관리로 일하며 서구 사회를 직접 경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서재필 등과 교류하며 개화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귀국하여 법무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는 재판소 구성법과 행정구역 개편 등 근대적 사법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김홍집 내각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각종 개혁안을 추진하였으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자 주미 공사로 발령받아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서광범은 주미 공사로 재임하던 중 병을 얻어 1897년 워싱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비록 정치적 격변기에 활동하며 자신의 뜻을 완전히 펼치지는 못했으나, 조선의 중세적 틀을 깨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이론적 토대와 실천적 기틀을 마련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