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마사유키는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다이묘이자 무장이다. 시나노국의 고쿠진 영주인 사나다 유키타카의 삼남으로 태어나 다케다 신겐의 휘하에서 무사로서의 역량을 키웠다. 다케다 가문 내에서 '두 눈'이라 불릴 정도로 신뢰를 얻었으나, 1582년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난세에서의 생존을 도모했다.
다케다 가문의 멸망 이후 마사유키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오다 노부나가, 호조 우지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능숙한 외교술을 펼쳤다. 그는 세력 판도에 따라 주군을 수시로 바꾸는 행보를 보였는데, 이는 당시의 가혹한 생존 경쟁 속에서 영지와 가문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결단력으로 인해 '표리부동한 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마사유키의 군사적 재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도쿠가와 가문과 대립하며 벌인 제1차 우에다 성 전투이다. 1585년,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도쿠가와 군대를 상대로 마사유키는 우에다 성의 지형지물과 기만전술을 완벽하게 활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친 이 승리는 마사유키의 이름을 일본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평생의 경계 대상으로 각인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마사유키는 가문의 멸문을 막기 위해 장남 노부유키를 동군에, 차남 노부시게와 자신은 서군에 가담시키는 전략적 분할을 선택했다. 제2차 우에다 성 전투에서 그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도쿠가와 본대 3만 8천 명을 단 2천 명의 병력으로 발을 묶어두어 세키가하라 본 전장에 합류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서군이 패배한 후 사형 위기에 처했으나, 동군에 가담했던 장남 노부유키의 간청으로 사형을 면하고 기이국의 구도야마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인 구도야마에서 재기를 꿈꾸며 세월을 보내던 마사유키는 1611년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비록 천하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탁월한 지략과 전술로 도쿠가와 가문을 두 번이나 패퇴시킨 인물로서 후세에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전략적 유산은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이어져 오사카 전투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는 밑바탕이 되었으며, 사나다 가문은 장남 노부유키를 통해 에도 시대에도 다이묘로서 명맥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