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태후(扶餘太后)는 백제 제31대 의자왕의 어머니이자 무왕의 왕비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구체적인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으나, 의자왕 초기 백제 내부의 권력 구조 변화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통해 그녀의 존재와 그 사망 시점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서기』 황극천황 원년(642년) 기록에 따르면, 그해 정월에 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시기는 의자왕이 즉위한 지 불과 2년째 되는 해로, 태후의 죽음과 동시에 백제 조정 내에서는 대규모 숙청이 단행되었다. 당시 교기(翹岐)를 비롯한 왕족 4명과 고위 관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태후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백제 내부의 정계 개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부여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의자왕이 친정 체제를 강화하고 왕권을 확립한 것으로 분석한다. 태후는 무왕 대부터 이어져 온 귀족 연합 정권의 상징적 중심축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녀의 사후에 벌어진 대규모 추방 사건은 태후를 정점으로 형성되어 있던 기존의 보수적인 귀족 세력을 의자왕이 척결하고, 국왕 중심의 전제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변동으로 이해된다.
부여태후의 정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무왕조에 등장하는 선화공주와 동일인물인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에서 무왕의 왕후가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로 밝혀짐에 따라, 부여태후가 사택왕후 본인인지 혹은 또 다른 왕후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갈리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녀가 백제 말기 중앙 정계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그녀의 부재가 백제 권력 구조의 지각 변동을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부여태후는 백제 멸망 이전, 왕실의 권위와 귀족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의자왕이 초기 정국을 주도하며 왕권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녀가 차지했던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사망 직후 일어난 정치적 풍파는 백제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기 전 겪었던 마지막 대규모 권력 재편 과정의 상징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