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

벽파(僻派)는 조선 후기 정조 대에서 순조 대에 이르기까지 정국을 주도했던 노론 내의 한 정파이다.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영조의 조치가 정당했다고 주장하며, 국왕의 권위와 성리학적 의리론을 철저히 고수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벽파라는 명칭은 '치우친 무리'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시파(時派)에 의해 불리기도 했으나, 스스로는 정통 성리학의 명분을 지키는 '의리(義理)'의 집단임을 자부하였다.

벽파의 기원은 영조 대의 임오화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건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시파와 달리, 벽파는 왕실의 질서와 국가의 기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영조의 입장을 옹호했다. 이러한 태도는 정조 즉위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서얼이나 남인 세력을 등용하려 할 때마다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충돌하였다.

정조 재위 기간 동안 벽파는 국왕의 탕평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시파와 치열하게 대립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을 꾀했으나, 벽파는 이를 성리학적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했다. 김귀주와 심환지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으며, 이들은 노론의 정통성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정조의 개혁 정치에 제동을 거는 보수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역할을 했다.

정조가 서거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벽파는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정순왕후의 배후 아래 벽파는 신유박해를 일으켜 서학(천주교)을 탄압했는데, 이는 단순히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이 시기 벽파는 정적들을 대거 숙청하며 조정을 장악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1805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벽파는 급격히 몰락했다. 시파 계열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벽파 인물들은 대거 유배되거나 처형되었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벽파는 조직적인 정치 세력으로서의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벽파는 조선 후기 당쟁사에서 원칙과 명분을 중시한 강경 보수파의 전형을 보여준 집단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