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렬(朴昌烈, 1899~1953)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경상남도 함안 출신이다. 그는 1919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3·1 운동의 흐름 속에서 지역 사회의 독립 의지를 결집하고 직접적인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19년 3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郡北面) 시장에서 일어난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당시 시위는 조용관(趙容寬), 이한구(李韓久) 등 지역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계획되었으며, 박창렬은 이들과 뜻을 같이하여 군중을 모으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시위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시위 당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 경찰 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제의 무력 진압에 맞서 격렬한 저항을 펼쳤다.
만세 시위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창렬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는 소위 보안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옥중에서도 일제의 강압적인 조사와 고문에 굴하지 않고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켰다. 출옥 이후에도 그는 지역 사회에 남아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후학들을 독려하며 조국의 해방을 기다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창렬의 숭고한 희생과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그의 활동은 경상남도 지역의 항일 투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며, 특히 군북면 만세 시위가 경남 지역 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로 인용된다. 그의 생애와 투쟁 기록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박창렬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맞서 민족의 자존감을 지키고 건국훈장과 포상의 근거가 되는 실천적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함안 지역에서는 매년 3·1 운동 기념행사를 통해 박창렬을 비롯한 독립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는 지역 사회의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핵심적인 역사적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