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문(朴永文, 1883~1920)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 운동 당시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제령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범한 농민의 삶을 살았으나, 국권 침탈 이후 고조된 민족의 독립 열망에 동참하여 지역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섰다.
1919년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던 이들이 독립 선언 소식을 전해오자, 가평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박영문은 정창화(鄭昌和), 장기영(張基榮) 등 동지들과 함께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는 3월 15일 북면 목동리 등지를 돌며 주민들에게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고, 이튿날인 3월 16일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가평읍으로 진출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시 시위대는 가평군청과 헌병 분견소 등을 돌며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박영문은 시위대의 선두에서 군중의 사기를 북돋우며 일제의 식민 통치를 규탄하였다. 일제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 대응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시위 주동자로 지목된 박영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박영문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열악한 수감 환경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만기 출옥을 얼마 앞두지 않은 1920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박영문의 투쟁은 가평 지역 민중들이 조직적으로 항일 운동에 나서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소박한 농민들이 주체가 된 독립운동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가평군 북면에는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