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중

박사중(朴師重, 1332년 ~ 1404년)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함장(咸丈), 호는 몽암(夢庵)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 이색, 정몽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적 토대를 닦았다.

고려 우왕 시기에는 성균관 사예 등을 역임하며 유학 교육에 힘썼으나, 외교 정책을 둘러싼 정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1375년(우왕 1)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문제로 권신 이인임, 지윤 등과 대립하였다. 당시 박사중은 정도전, 권근 등과 함께 친원 정책에 반대하고 명나라와의 외교적 신의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전라도 회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판선공시사 등의 관직에 복귀하였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이후에는 출사하여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 이후 판한성부사에 임명되어 도성 행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398년에는 검교참찬문하부사에 올랐다. 고려의 구신 출신이었으나 조선의 건국 초기 행정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실무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관료 사회의 안정에 일조하였다.

박사중은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소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격변하는 왕조 교체기 속에서도 유교적 통치 이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며, 그의 가문인 반남 박씨가 조선 시대 명문가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 중 한 명이다. 1404년(태종 4)에 7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예장(禮葬)의 예를 갖추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생애는 고려 말 신진사대부가 겪었던 정치적 시련과 조선 건국 이후의 관료적 적응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초기에는 외교적 명분을 중시하다 유배를 겪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선 초기 국가 경영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 관료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 후대에 그가 남긴 문학적 자산과 정치적 행적은 조선 초기 지배층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