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7세

미하일 7세 두카스는 1071년부터 1078년까지 재위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이다. 콘스탄티누스 10세와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두카스 가문 출신의 통치자였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가 셀주크 튀르크의 포로가 된 후, 스승이었던 미하일 프셀로스의 주도로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비잔티움 제국이 대내외적으로 급격히 몰락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그는 학구적인 성향이 강해 철학과 수사학 연구에 몰두했으나,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로서는 매우 무능했다. 국정을 직접 돌보기보다는 측근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특히 환관 니케포리치스에게 실권을 맡기면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니케포리치스가 시행한 곡물 전매 제도와 가혹한 조세 정책은 민중의 원성을 샀고, 이는 제국 내부의 경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제적 혼란은 화폐 가치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미하일 7세 시기에 금화인 노미스마의 금 함량이 크게 줄어들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곡물 가격이 폭등했다. 사람들은 그가 화폐 가치를 깎아 곡물 한 단위에서 4분의 1을 떼어먹었다는 의미에서 '파라피나케스(Parapinakes)'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였다. 대외적으로도 소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셀주크 튀르크에게 상실했으며, 남부 이탈리아의 마지막 거점인 바리마저 노르만족에게 함락당하는 수치를 겪었다.

제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의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서부에서는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동부에서는 니케포로스 보타네이아테스가 군대를 이으키며 황제 자리를 위협했다. 결국 1078년, 민심을 잃고 지지 세력이 와해된 미하일 7세는 스스로 황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에페소스의 대주교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비잔티움 제국이 중세의 영광을 잃고 장기적인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