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의 노래(露營의 노래)'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 제국에서 발표되어 널리 불렸던 대표적인 전시 군가다. 일본어 원제는 '리에이노 우타(露営の歌)'이며, 여기서 '노영(露營)'이란 군대가 천막 등의 병영 시설 없이 야외에서 진을 치고 숙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곡은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한 전승 기원 군가 공모전에서 당선된 야부우치 기이치로(藪内喜一郎)의 가사에 당대의 유명 작곡가 고세키 유지(古関裕而)가 곡을 붙여 완성되었으며,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다.
본래 이 곡은 공모전 1등 당선작이었던 '진군의 노래(進軍の歌)' 레코드판의 이면(B면)에 수록된 보조적인 곡이었으나, 발매 직후 타이틀곡을 뛰어넘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씩씩한 행진곡풍이 강했던 일반적인 군가와 달리, '노영의 노래'는 단조의 우울하고 비장한 선율을 띠고 있었다. 전장에서 전우를 잃은 슬픔과 열악한 노영 생활의 고단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고 돌아가겠다는 결연함을 담은 가사는 당시 전장으로 향하는 병사들과 후방 가족들의 복합적인 감정을 자극하며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노영의 노래'의 유행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즉각적이고 강압적으로 유입되었다. 1930년대 후반은 일제가 전시 체제를 강화하며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이던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고 사상을 통제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이 노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각종 관제 행사와 학교 조회 시간은 물론, 라디오 방송과 축음기를 통해서도 이 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으며, 조선의 학생과 민중들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이 군가를 부르도록 강요받았다.
당시 조선의 대중음악계와 문화계 역시 이러한 강압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노영의 노래'가 지닌 특유의 단조 멜로디와 비장미는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트로트(엔카) 풍의 대중가요 정서와도 닿아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이용해 대중의 거부감을 줄이면서 전쟁 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주입했다. 조선의 유명 가수나 악단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하거나 가창해야만 했고, 이는 식민지 시대 예술인들이 겪어야 했던 강제 동원과 문화적 통제의 뼈아픈 단면을 보여준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광복을 맞이하면서 '노영의 노래'는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의 잔재로 여겨져 한국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금기시되고 축출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역사학계 및 음악학계에서 이 노래는 단순한 과거의 유행가를 넘어, 음악이 어떻게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 동원 도구로 전락하고 식민지 민중의 정신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었는지를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로 다루어진다. 전시 동원 체제기 일제가 자행한 문화적 폭력과 동화 정책을 상징하는 곡으로서 철저히 비판적인 관점에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