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조선)

김수(金睟, 1537~1597)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수보(粹甫)이다. 사헌부 집의를 지낸 김희수(金希粹)의 아들이며,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공조좌랑,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성품이 꼼꼼하고 행정 처리에 능하다는 평을 받아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지방관으로서의 경력도 화려하여 함경도 경성 판관 시절에는 야인의 침입을 막아내는 공을 세웠으며,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며 지역의 통치 기반을 다졌다. 1591년에는 일본의 침략 징후가 포착되자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김수는 영남 지역의 성곽을 수축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힘썼으나, 급격한 부역 동원으로 인해 현지 민심이 악화되는 부작용을 겪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수는 경상도 관찰사로서 전쟁 초기 방어의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맞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대구와 안동 등지로 후퇴하면서 백성과 조정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후 임금의 피란길에 합류하여 평안도 지역에서 군량 조달과 군사 모집에 힘썼으며, 삼도 순찰사로 임명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후방 행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 기간 중 한성판윤,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나 정유재란이 시작되던 1597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나,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관찰사로서 성을 버리고 후퇴한 행적 때문에 당대 유학자들과 민중들로부터 책임 회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면치 못했다. 그의 생애와 활동은 전란 초기 조선의 방어 체계 실패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