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은 1986년 4월 28일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세진과 이재호가 전두환 정권의 군사 독재와 미국의 외교 정책에 항거하며 분신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80년대 학생운동이 단순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넘어 반미 및 반핵 운동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제5공화국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 있었으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회복과 사회 변혁을 위한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었다.
사건 당일 오전 10시경, 서울대학교 학생 약 400여 명은 서울 신림동 신림사거리 인근 건물 옥상 등에서 '전방입소교육 전면 거부'와 '한반도 핵기지화 반대'를 외치며 기습 시위를 벌였다. 당시 미학부 4학년이자 서울대 미추홀자율학생협의회 회장이었던 김세진과 정치학과 4학년이자 반미반핵평화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재호는 건물 위에서 "반전반핵 양키고홈", "직선제 개헌 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다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이들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강요되던 전방부대 입소 교육이 학생들을 정권의 통제 아래 두려는 군사 파쇼적 책동이라고 비판했다.
분신 직후 이들은 인근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전신에 입은 극심한 화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사망했다. 김세진은 5월 3일에, 이재호는 5월 26일에 각각 숨을 거두었다. 이들의 희생은 학생운동권은 물론 시민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공권력의 폭압적인 진압 방식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촉발했다. 정부는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기 위해 장례 절차를 엄격히 통제하고 시신을 탈취하려 시도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으나, 학생들은 대규모 추모 집회를 열어 고인들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다짐했다.
이 사건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반미자주화'와 '반전반핵'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노선을 대중적으로 정립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전의 운동이 주로 국내 정치적 민주화와 전두환 정권 퇴진에 집중했다면, 이 사건 이후로는 한반도의 평화 문제와 미국과의 외교 관계 재정립이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 특히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묵인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인식이 대학가에 확산되면서, 학생들의 투쟁 대상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김세진과 이재호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어 광주 망월동 묘역 등에 안장되었으며, 서울대학교 교정에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매년 4월이면 이들의 뜻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리고 있으며, 이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 민주화 투쟁의 흐름 속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투쟁 정신은 이후 한국 사회의 자주권 회복과 평화 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