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키부노 나이시(小式部内侍)는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의 여류 시인이자 가인(歌人)이다. 아버지는 에치젠노카미를 지낸 타치바나노 미치사다(橘道貞)이며, 어머니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이다. 어머니인 이즈미 시키부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에 '고(小)'를 붙여 고시키부노 나이시라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이치조 천황의 중궁인 후지와라노 쇼시(藤原彰子)를 섬기는 뇨보(女房)로 입궁하여 활동했다. 당시 쇼시의 후궁에는 무라사키 시키부, 이즈미 시키부 등 뛰어난 문학적 역량을 가진 여성들이 모여 있었는데,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그중에서도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특히 그녀는 즉흥적인 재치와 세련된 표현법으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고시키부노 나이시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는 『백인일수(百人一首)』 60번에 수록된 와카(和歌)의 탄생 배경이다. 가합(歌合)을 앞두고 후지와라노 사다요리(藤原定頼)가 그녀에게 "어머니(이즈미 시키부)에게 대작을 부탁하러 보낸 심부름꾼은 돌아왔느냐"라고 비아냥거리며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자, 그녀는 즉석에서 사다요리의 소매를 붙잡고 시를 읊었다. 이때 읊은 시가 "오에산 넘고 이쿠노 길 멀어서, 아마노하시다테 소식조차 보지 못했네(大江山いく野の道の遠ければ まだふみもみず天の橋立)"이다.
이 시는 지명을 교묘하게 활용한 가케코토바(언어유희)와 '편지'와 '밟다'의 중의적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실력이 어머니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룩한 것임을 증명한 걸작으로 꼽힌다. 이 사건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명성에 가려진 존재가 아닌 독자적인 가인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으며, 중고 36가선(中古三十六歌仙)의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1025년경, 후지와라노 노리미치(藤原教通)의 아이를 출산하던 중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녀의 요절은 당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어머니 이즈미 시키부는 딸을 잃은 슬픔을 담은 애상가를 남겨 후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의 작품은 『후습유와카집(後拾遺和歌集)』을 비롯한 여러 칙찬 와카집에 다수 수록되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