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파(奸智派)는 고려 무신정권기, 특히 최씨 정권 시대에 권력의 중심부에서 활동했던 일단의 문신 관료 집단을 지칭한다. 이들은 유교적 소양과 도덕적 명분을 중시하던 전통적인 문치주의 관료들과 달리, 세속적인 지혜와 임기응변에 능하며 무신 집권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실무 능력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간사한 지혜'를 가졌다는 뜻의 '간지(奸智)'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주로 당대 혹은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명명되었다.
간지파가 형성된 배경은 무신정변 이후의 급격한 정치적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170년 무신란 이후 기존의 문신 관료 체제가 붕괴하고 행정적 공백이 발생하자, 무신 집권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뒷받침하고 복잡한 국가 행정을 처리할 새로운 인적 자원을 필요로 했다. 이때 유교적 원칙을 고수하며 무신 정권에 저항하던 이들과 달리, 현실적인 권력 관계를 인정하고 개인의 입신양명을 꾀하던 관료들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며 이 파벌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최씨 정권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집중되었다. 간지파 관료들은 최충헌이나 최우 등 무신 집권자의 비서 기구였던 정방(政房)과 서방(書房) 등에 배치되어 인사 행정과 정책 수립을 주도하였다. 특히 왕실과 무신 정권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권력의 균형을 맞추는 한편, 집권자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법과 제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며 새로운 권세가로 성장하였다.
간지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충의나 민생보다는 권력의 향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반복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에서는 이들을 국가의 안위보다 개인의 영달을 우선시한 인물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무신 정권이라는 비정상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도 고려의 행정 체계가 마비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도록 실무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 학술적으로 주목받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간지파의 등장은 고려 후기 관료 사회의 성격 변화를 상징하는 현상이다. 이들은 명분 중심의 정치 문화에서 실리 중심의 정치 문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면을 보여주었으며, 이들의 존재 양태는 이후 원 간섭기를 거쳐 등장하는 권문세족의 형성 과정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활동 방식은 전근대 한국 정치사에서 지식인 계층이 권력과 결탁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