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HI

이치(ICHI)는 2008년에 개봉한 일본의 시대극 액션 영화이다. '핑퐁'으로 잘 알려진 소리 후미히코가 감독을 맡았으며, 일본의 인기 배우 아야세 하루카가 주인공인 맹인 검객 '이치'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 작품은 일본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캐릭터인 '자토이치'를 여성 버전으로 재해석한 기획으로, 원작의 주인공이 맹인 안마사였던 것과 달리 본작의 주인공은 샤미센을 연주하며 유랑하는 맹인 여성 예능인인 '고제(瞽女)'로 설정되어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발군의 검술 실력을 감추고 있는 이치가 자신에게 검을 가르쳐준 맹인 스승을 찾아 여행하는 과정을 그린다. 여행 도중 이치는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으나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검을 뽑지 못하는 떠돌이 무사 토마(오사와 타카오 분)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만키토라는 악당 집단이 지배하는 마을에 당도하게 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폭력과 갈등에 휘말리며 거대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주인공 이치를 연기한 아야세 하루카는 이 역할을 위해 크랭크인 전부터 맹인 연기와 검술 액션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그녀는 초점 없는 눈빛 연기와 더불어 지팡이 속에 칼을 숨긴 시코미즈에(仕込み杖)를 활용한 역수검법(칼을 거꾸로 쥐는 검법)을 선보이며 기존의 청순한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액션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영화는 원작 자토이치가 가진 호탕하고 능글맞은 성격 대신, 세상과 단절된 채 고독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내면에 집중하여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을 강화했다.

소리 후미히코 감독은 특기인 시각 효과(VFX)와 초고속 카메라를 활용한 슬로 모션 기법을 액션 연출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를 통해 검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이나 빗방울, 피가 튀는 장면 등을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시하게 묘사했다. 이는 투박하고 처절한 리얼리티를 강조했던 가츠 신타로의 원작 시리즈나 리듬감 있는 액션을 선보인 기타노 타케시의 2003년작 '자토이치'와는 차별화되는 지점으로, 현대적인 영상미가 돋보이는 퓨전 시대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비평적 측면에서는 고전 명작을 여성 서사로 변주했다는 시도가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으나,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캐릭터의 입체감이 원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특히 액션 영화로서의 쾌감보다는 주인공의 비극적인 운명과 감정선에 치중한 연출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치(ICHI)는 아야세 하루카의 대표적인 액션 필모그래피 중 하나로 꼽히며, 일본 시대극 장르에서 여성 맹인 검객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확립한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