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

885년은 9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시기로,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기존 체제가 흔들리고 새로운 권력 구조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동아시아에서는 당나라의 국력이 쇠퇴하며 지방 번진 세력이 득세했고, 한반도의 신라 또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징후가 뚜렷해졌다. 서유럽에서는 바이킹의 침략이 정점에 달하며 도시의 방어 체계와 봉건적 유대가 시험대에 올랐던 해다.

한반도의 신라에서는 제49대 헌강왕이 서거하고 그의 동생인 정강왕이 즉위했다. 헌강왕 재위 중기까지는 겉보기에 태평성대를 누리는 듯했으나, 885년 무렵에는 귀족들의 사치와 토지 겸병으로 인해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졌고 지방에 대한 통제권이 점차 상실되고 있었다. 정강왕은 즉위 직후 이찬 김위홍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사벌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등 정국 안정을 꾀했으나, 신라의 하대적 혼란상을 완전히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유럽 역사에서 885년은 '파리 공성전'이 시작된 해로 기록된다. 수백 척의 선박에 나눠 탄 대규모 바이킹 군단이 센 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프랑크 왕국의 중심지인 파리를 포위했다. 당시 파리 백작 오도(Odo)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바이킹의 끈질긴 공격을 방어해냈으며, 이는 훗날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가 추락하고 로베르 가문이 부상하여 카페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동남유럽의 발칸반도에서는 기독교 문화 전파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슬라브어 성서 번역에 힘썼던 성 메토디우스가 이 해에 사망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라비아에서 추방되어 불가리아 제1제국으로 이동했다.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는 이들을 환대하여 슬라브 문학 학교를 세우도록 지원했다. 이는 글라고리 문자와 초기 키릴 문자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슬라브 민족의 독자적인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학적으로 885는 884보다 크고 886보다 작은 자연수다. 이 수는 합성수로, 약수는 1, 3, 5, 15, 59, 177, 295, 885까지 총 8개다. 소인수분해를 하면 3 × 5 × 59로 나타낼 수 있으며, 십진법 체계 내에서 일상적인 수치 측정이나 연도 표기 등에 활용된다. 또한 885는 연속된 홀수의 합이나 특정 기하학적 수열의 합 등으로 분석되기도 하며, 현대 정보통신이나 번호 체계에서도 식별 번호의 일부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