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년은 7세기 전반의 해로, 동아시아에서는 당나라의 세력 팽창과 이에 대응하는 주변국들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가 국가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 태종의 정관의 치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주변국들에 대한 압박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하다.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의 잠재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를 시작했다. 영류왕은 당나라와 표면적으로는 화친 정책을 유지했으나, 당의 팽창주의적 태도에 위협을 느끼고 북쪽의 부여성에서 남쪽 해안의 비사성에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 대규모 토목 공사는 향후 16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훗날 권력을 잡게 되는 연개소문이 이 공사의 감독을 맡으며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에서는 진평왕 재위 말기에 중앙 귀족 세력의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 아찬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이다. 이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층 내부의 갈등과 진평왕 사후에 전개될 선덕여왕의 즉위 과정에서 나타날 정치적 격변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신라는 내부적인 진통을 겪으면서도 당나라와의 외교적 접촉을 지속하며 생존 전략을 모색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 장손사를 보내 수나라와의 전쟁 당시 전사한 수나라 군사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는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허물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된 압박이었다. 고구려는 당의 요구를 수용하여 경관을 허물었으나, 이는 양국 간의 신뢰 구축보다는 오히려 장기적인 전쟁 준비와 긴장 상태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슬람 공동체의 기틀을 확고히 하던 시기였다. 서남아시아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신흥 이슬람 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 지구적으로 볼 때 631년은 기존의 제국들이 쇠퇴하거나 새로운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가운데, 새로운 질서와 세력이 태동하던 격동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