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년

607년은 동아시아 정세가 수나라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던 시기였다. 수 양제는 대외 팽창 정책을 본격화하며 주변국들에 조공과 복속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러한 수나라의 패권주의는 고구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과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이는 훗날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든 대규모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고구려 영양왕 시기였던 이 해에 중대한 외교적 사건이 발생했다. 수 양제가 북방의 돌궐 계민가한의 천막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은밀히 돌궐과 교섭 중이던 고구려 사신을 대면하게 된다. 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여 수나라를 견제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으며, 고구려 사신에게 영양왕이 직접 수나라에 입조하여 충성을 보일 것을 명령하며 압박했다. 이 사건은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의 외교적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왜(일본)에서는 아스카 시대쇼토쿠 태자가 주도하여 견수사를 파견했다. 오노노 이모코가 이끄는 사절단은 수나라에 국서를 전달했는데, 여기에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수 양제는 이를 보고 자신과 대등한 지위를 주장하는 왜의 태도에 크게 불쾌해했으나, 당시 고구려와의 갈등 등 대외적 요인으로 인해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다. 이는 일본이 중국 중심의 책봉-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천하관을 표출한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백제 무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고구려를 견제하는 외교 전략을 펼쳤다. 백제는 수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수 양제는 백제 사신에게 고구려의 동태를 살피라는 밀명을 내리기도 했다. 한편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재위하며 내부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 속에서 수나라와의 외교적 접촉을 시도하며 생존과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서구권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 포카스 황제의 치하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제국 내부의 혼란과 외세의 침략이 겹치며 비잔티움 제국은 쇠퇴의 기로에 서 있었으며, 이는 훗날 이슬람 세력의 부상과 맞물려 중세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607년은 동양과 서양 모두 제국 간의 갈등과 외교적 수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격동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