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년은 5세기의 후반기에 속하는 해로, 동서양 모두에서 정치적 격변과 체제 정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서구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며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키려 시도하였고, 동양에서는 한반도의 삼국과 중국의 남북조 왕조들이 치열한 외교전과 영토 확장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고대 국가에서 중세적 질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467년 4월 12일, 안테미우스가 로마 인근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1세의 지지를 받아 임명되었으며, 이는 당시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게르만 출신 장군 리키메르와의 타협 산물이기도 했다. 안테미우스의 등극은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의 위협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고 제국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부적인 권력 갈등과 군사적 실패로 인해 제국의 쇠퇴를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유송이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북위의 헌문제는 통치 체제를 정비하며 선비족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었고, 유송의 명제는 내부의 반란을 진압한 후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심했다. 이 과정에서 두 국가는 한반도의 삼국과도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으며 세력 균형을 꾀했다. 특히 이 시기 북위에서는 불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되면서 대규모 석굴 사원 조성과 같은 불교 예술이 번창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이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남진 정책과 다각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장수왕은 중국의 북위와 유송 모두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는 등 실리적인 외교 노선을 견지하며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이러한 안정된 대외 관계는 고구려가 한반도 중남부로 진출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백제는 개로왕의 통치 아래 고구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을 견디기 위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해달라는 요청을 준비하는 등 외교적 돌파구를 찾고자 노력했다. 한편, 신라는 자비 마립간 시기를 지나며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고 있었으며, 왜구의 빈번한 침입에 맞서 성을 쌓고 국방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처럼 467년의 한반도 삼국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며 긴장감 넘치는 경쟁 관계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