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년은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념비적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고구려 제20대 국왕인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현재의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했다. 이 비석은 412년에 서거한 광개토대왕의 3년 상을 치른 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전성기의 위상과 동아시아 내에서의 패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로 평가받는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높이가 약 6.3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응회암 석비로, 네 면에 걸쳐 총 1,775자의 한자가 예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왕실의 계보를 담은 머리말,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본문, 그리고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대한 규정 등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 기록은 5세기 당시 고구려인들의 천하관과 독자적인 연호인 '영락(永樂)'의 사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 동부여, 왜 등 주변국과의 정치적, 군사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1차 사료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같은 시기 동아시아 대륙에서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란과 남조 동진(東晉)의 쇠퇴가 이어지고 있었다. 414년 중국 북부에서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인 서진(西秦)이 남량(南凉)의 수도를 함락시키며 남량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불교 역사상 중요한 성과도 있었다. 승려 법현(法顯)이 10여 년에 걸친 인도 성지순례와 불경 구법 활동을 마치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 칭저우(청주)로 무사히 귀국했다. 법현은 이후 자신의 여정을 기록한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5세기 초 인도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의 지리, 풍속, 불교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세계적인 고전문헌으로 남았다.
서양의 로마 제국 역시 정치적 격변과 권력의 이동을 겪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이인 풀케리아(Pulcheria)가 황후 또는 여황제를 뜻하는 최고 칭호인 '아우구스타(Augusta)'로 선포되었다. 그녀는 어린 동생을 대신해 섭정을 맡으며 강력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의 국정과 종교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한편 쇠락해 가던 서로마 제국 영토 내에서는 갈리아의 나르본 지역에서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프가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이복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410년 로마 약탈 당시 포로로 잡혀갔던 황실의 공주가 야만족 지도자의 아내가 된 이 사건은 로마 제국의 쇠락과 게르만족의 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414년은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거대한 석비를 통해 자국의 팽창과 위엄을 역사에 새기고 구법승의 귀환으로 문화 교류의 장이 열렸으며, 서양에서는 로마 제국의 권력이 재편되고 새로운 게르만 세력이 로마 체제 내로 융합되어 가는 과도기적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