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년은 율리우스력의 평년이다. 로마 제국은 이 시기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혼란기를 겪고 있었으며,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가 공동 황제로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제국 내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공식화하는 첫 번째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 성직자들은 로마의 전통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강요받았으며, 이를 거부할 경우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유배를 가야 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의 집회와 지하 묘지(카타콤) 방문이 엄격히 금지되는 등 종교적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동아시아의 삼국시대에서는 조위(曹魏) 내부의 권력 투쟁과 대규모 반란이 발생한 중요한 해이다. 당시 위나라의 실권은 사마소(司馬昭)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찬탈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반대파를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위나라의 양주도독 제갈탄(諸葛誕)은 수춘(壽春)에서 사마소의 독재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제갈탄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사마씨 일가의 집권 과정에서 일어난 수춘 삼반 중 마지막 반란이다.
제갈탄은 위나라 중앙군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제갈정을 동오(東吳)에 인질로 보내며 구원을 요청했다. 동오의 실권자였던 손침(孫綝)은 이를 위나라를 크게 약화시킬 기회로 판단하고, 전단과 당자 등을 파견해 대규모 원군을 수춘으로 보내 제갈탄을 지원했다. 한편, 촉한(蜀漢)의 대장군 강유(姜維) 역시 조위가 수춘의 반란 진압에 집중하는 틈을 타 북벌을 단행했다. 강유는 진천으로 나아가 장성(長城) 일대에서 위나라 군대와 대치하며 조위를 압박했으나, 위나라 장수 사마망과 등애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큰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반도의 삼국은 상대적으로 대규모 전쟁보다는 내부 체제 정비와 국력 회복에 집중하고 있던 시기였다. 고구려는 중천왕이 다스리고 있었으며, 과거 240년대에 있었던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으로 입은 수도 파괴 등의 피해를 복구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 있었다. 백제는 고이왕 통치하에 있었으며, 율령을 반포하고 6좌평 제도와 16관등제를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신라는 첨해 이사금 시기로, 주변 소국들과의 외교적 교류 및 국경 수비에 힘을 쏟으며 영토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종합적으로 257년은 서양과 동양 모두에서 심각한 내부 갈등과 권력의 재편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로마 제국은 전염병, 이민족의 침입, 종교적 갈등이 겹치며 제국의 분열 조짐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중국은 사마씨의 권력 장악을 둘러싼 대규모 내전과 촉, 오 양국의 개입으로 인해 삼국의 판도가 요동쳤으며, 이는 훗날 서진(西晉)이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역사적 흐름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