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중국 허베이성 탕산시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20세기 최대의 인명 피해를 기록한 자연재해 중 하나다. 리히터 규모 7.5에서 7.8 사이로 추정되는 이 지진은 도시 전체가 잠든 새벽 시간에 발생하여 주민들이 대피할 틈도 없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진앙은 탕산시 지하 약 11km 지점이었으며, 강력한 진동은 인근 베이징과 톈진까지 감지될 정도로 파괴력이 컸다.
지진의 여파로 인구 100만 명의 공업 도시였던 탕산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중국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는 24만 2,419명에 달하며, 부상자 또한 16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비공식적인 통계들을 고려할 때 실제 사망자 수는 60만 명 이상일 것이라는 추정도 존재한다. 도시 건물의 약 90% 이상이 붕괴되었으며, 철도, 도로, 통신망 등 도시의 모든 기간 시설이 완전히 마비되어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되었다.
탕산 대지진은 예고 없이 찾아온 재앙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이었다. 1975년 하이청 지진 당시에는 전조 현상을 포착하여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탕산의 경우 뚜렷한 징후가 나타나지 않아 사전에 경보가 발령되지 않았다. 본진이 발생한 지 약 15시간 후에는 규모 7.1의 강력한 여진이 뒤따라 구조 작업 중이던 인원들과 생존자들에게 심각한 2차 피해를 입혔다. 지질학적으로는 탕산-창리 단층대의 급격한 움직임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막바지에 있었으며,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의 사망을 불과 두 달 앞둔 정치적 격변기였다. 중국 정부는 자력갱생의 원칙을 고수하며 국제 사회의 구호물자와 인력 지원을 거부한 채 독자적으로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이 지진은 중국 사회에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주었으며, 대지진을 왕조의 몰락이나 큰 정치적 변화의 전조로 여겼던 전통적 관념과 맞물려 민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탕산시는 수십 년에 걸친 재건 사업을 통해 현대적인 공업 도시로 탈바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