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화교배척폭동은 그해 7월 일제의 조작과 선동에 의해 한반도 전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화교 폭력 사태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만주 장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수로 문제를 두고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만보산 사건’이었다. 당시 일제는 이 사건을 이용해 중국인이 조선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허위 사실과 과장된 정보를 유포하였고, 국내 언론사들이 이를 확인 없이 긴급 보도하면서 민중의 분노가 화교들에게 향하게 되었다.
폭동은 7월 3일 인천을 시작으로 서울, 원산, 평양 등 주요 도시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특히 평양에서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는데, 수천 명의 군중이 화교 거주지를 습격하여 무차별적인 폭행과 살해를 자행했다. 화교들이 운영하던 상점과 가옥은 약탈당한 뒤 불에 탔으며, 생존을 위협받은 화교들은 영사관이나 공공건물로 대피하거나 본국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 사태로 인한 인명 피해는 매우 참혹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약 127명에서 140여 명의 화교가 목숨을 잃었으며, 부상자는 수백 명에 달했다. 재산 피해 또한 막대하여 당시 한반도 내 화교 경제의 기반이 사실상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제 당국은 폭동이 진행되는 동안 치안 유지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사실상 사태를 방관하거나 조장하여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제가 폭동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방조한 주된 목적은 한·중 양 민족 간의 갈등을 조장하여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조선인의 항일 감정을 화교에게 전가함으로써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분산시키고, 동북아시아 내에서 일제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려 한 전략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항일 연대 전선은 일시적으로 균열이 생겼으며, 중국 내에서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는 등 외교적으로도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폭동 이후 만보산 사건의 실상이 왜곡되었음이 뒤늦게 밝혀졌으나, 이미 발생한 비극적 희생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1931년 화교배척폭동은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식민 권력의 음모가 결합하여 발생한 반인륜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사건은 한반도 내 화교 사회의 규모를 크게 위축시켰으며, 이후 화교들이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서 겪게 될 차별과 소외의 역사적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