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은 프랑스 혁명 전쟁의 여파가 유럽 전역을 넘어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확산된 해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고 영국의 인도 무역로를 차단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몰타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며 본격적인 원정의 서막을 알렸다. 이는 유럽 내부의 갈등이 세계적인 규모의 전략적 충돌로 변모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집트 원정 중 발생한 군사적 충돌은 세계사에 큰 궤적을 남겼다. 7월에 벌어진 피라미드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맘루크 기병대를 격파하며 카이로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8월 초,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섬멸하면서 프랑스군은 보급로가 차단되는 고립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이 원정 기간 중 프랑스 육군 장교 피에르 프랑수아 부샤르에 의해 로제타석이 발견되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결정적인 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서는 아일랜드 반란이 발발하였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영향을 받은 '통합 아일랜드인 협회'는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비록 프랑스 지원군이 일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은 비니거 힐 전투 등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며 최종적으로 진압당했다. 이 사건은 이후 1800년 연합법 제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으며, 아일랜드와 영국의 정치적 관계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미 대륙에서는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적 마찰로 인해 이른바 '유사 전쟁(Quasi-War)'이라 불리는 해상 충돌이 전개되었다. 미국 의회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외국인 및 선동법(Alien and Sedition Acts)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표현의 자유와 이민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로서 미국 내부에서 큰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학술계에서는 토머스 맬서스가 《인구론》 초판을 익명으로 출간하여 인구 증가와 식량 생산의 불균형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제시하며 근대 경제학 및 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서는 정조 22년을 맞이하여 국왕의 주도 아래 개혁 정책이 지속되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학문 정치와 화성을 거점으로 한 국방 강화에 힘썼으나, 당해에는 극심한 가뭄과 흉년이 겹치면서 민생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조세를 감면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구제책 마련에 고심하였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실학적 학풍이 심화되며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