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년은 고려 숙종 7년이자 북송의 휘종 시기에 해당하는 해로,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정치적 전환점과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고려에서는 화폐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구체화되었으며, 중동에서는 십자군 전쟁 이후 성립된 기독교 국가들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고려 조정은 이해에 주전도감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 5천 관을 주조하였다. 숙종은 이를 문무백관과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며 화폐 유통을 공식화하고자 했으며, 개경의 시전(市街)에는 주점을 설치하여 화폐 사용을 장려했다. 이는 국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함으로써 중앙 집권적인 경제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시도로 평가받으나, 여전히 물물교환 중심이었던 민간 경제의 한계로 인해 완전한 정착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북송에서는 황제 휘종이 통치하던 중, 채경(蔡京)이 재상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장악했다. 채경은 왕안석의 신법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당쟁을 격화시키고 반대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를 세워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내부 정계의 불안정은 훗날 북송의 국력이 쇠퇴하고 여진족의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복선이 되었다.
중동 지역에서는 제1차 십자군 전쟁 이후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이 이슬람 세력과 격돌을 지속했다. 1102년 5월, 파티마 왕조의 군대와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가 맞붙은 제2차 람라 전투가 벌어졌다. 초기 전투에서 십자군 기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배 직전까지 몰렸으나, 보두앵 1세가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지원군을 이끌고 반격에 성공함으로써 예루살렘을 방어해낼 수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왕권을 강화하며 교회와의 서임권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와 갈등하며 세속 군주의 성직자 임명권을 주장하였고, 이는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던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있었다. 또한 이 시기 유럽의 주요 대학들이 맹아를 틔우기 시작하며 중세 지성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