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귀달(洪貴達, 1438~150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유재(虛宥齋) 또는 우정(寓亭)이다. 경상도 경산현에서 태어났으며, 1460년(세조 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세조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을 섬기며 중앙 정계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성종 재위 기간 동안 홍귀달은 홍문관 제학,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 중책을 맡으며 유교적 통치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문장력이 매우 뛰어나 국가의 주요 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으며, 성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강직한 성품을 지녀 조정 내에서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 사이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합리적인 정책을 제안하는 관료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학문적으로 홍귀달은 당대 문형(文衡)을 맡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의 저서인 『허유재집(虛宥齋集)』은 조선 초기 문학 및 사상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권학문(勸學文)」을 지어 유학의 보급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의 문장은 화려한 수사보다는 논리적이고 명료한 것이 특징이었으며, 이는 당대와 후대 학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연산군 대에 이르러 홍귀달은 왕의 실정(失政)과 폭거에 직언을 서슴지 않으며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인 사건은 연산군이 홍귀달의 손녀를 궁중으로 들이라는 명을 내렸을 때 발생하였다. 홍귀달은 병을 핑계로 이를 거절하였고, 이는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큰 분노를 샀다. 이 사건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의 전개 과정에서 그가 숙청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결국 홍귀달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연산군이 보낸 금부도사에 의해 경기도 단양 부근에서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그의 관작이 복구되고 신원(伸寃)되었으며, 숙종 때에 이르러 '문광(文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권력의 압박 속에서도 유교적 선비의 절개를 지킨 인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경북 상주의 도남서원 등에 배향되어 오늘날까지 그 기개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