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인 가문(洞院家)은 일본의 중세 시대에 번영했던 공가(公家) 가문으로,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의 한 지류인 칸인류(閑院流)에 속한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에 후지와라노 사네오(藤原実雄)를 시조로 하여 창설되었으며, 대신(大臣)을 배출할 수 있는 격식 높은 가문인 대신가(大臣家)의 가격(家格)을 지녔다. 가문의 명칭은 가마쿠라의 토인에 위치했던 저택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문은 왕실과의 긴밀한 혼인 관계를 통해 조정 내에서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시조인 사네오의 딸인 인시(佶子)가 고후카쿠사 천황의 중궁이 되고, 다른 딸인 가이시(愔子)가 가메야마 천황의 후궁이 되어 지묘인통과 다이카쿠지통 양쪽 모두의 외척이 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가문의 구성원들은 태정대신, 좌대신, 우대신 등 조정의 최고위 관직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학문과 유직고실(有職故実) 분야에서도 토인 가문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대표적인 인물인 토인 긴카타(洞院公賢)는 남북조 시대의 대동란기 속에서 조정의 의례와 전례를 정리하고 보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남긴 상세한 일기인 『엔타이랴쿠(園太暦)』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사회상과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1차 사료로 평가받으며, 후세 공가 사회의 행동 규범이 되었다.
토인 가문의 학술적 전통은 긴카타 이후에도 계승되어 여러 방면에서 빛을 발했다. 이들은 가문의 비전으로 전해지는 의례 지식을 바탕으로 조정의 행사를 주관했으며, 고전 문학 연구와 가도(歌道)에도 깊이 관여했다. 특히 가문의 일원이었던 토인 사네히로 등은 복잡한 조정 행정 절차를 체계화하여 전란 속에서도 천황 중심의 의례 체계가 유지될 수 있는 학문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에 접어들면서 토인 가문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가문의 세력은 여전히 유지되었으나, 전국 시대의 혼란과 경제적 기반의 상실, 그리고 후계자 문제 등이 겹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16세기 중반, 당주였던 토인 사네히사(洞院実久)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함으로써 토인 가문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가문의 종가는 사라졌으나 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토인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방대한 양의 고문서와 기록물들은 다른 공가 가문들에 의해 수습되어 보존되었으며, 이는 에도 시대 이후 공가 문화의 재건과 유직고실 연구의 근간이 되었다. 토인 가문은 일본 중세 조정 정치의 정점에서 권세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성취를 통해 일본 전통 문화의 전승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가문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