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우치 료마(竹内 量磨, 1836년 1월 3일 ~ 1867년 12월 10일)는 일본 메이지 시대 초기의 정치가이자 혁명가로, 일본의 근대화와 서구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명은 타케우치 고도(竹内 小道)이며, 후에 료마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의 출생지는 시코쿠 지역의 도사(土佐)로,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료마는 젊은 시절부터 서양의 기술과 사상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특히 해양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62년, 미국으로 가서 조선과의 무역을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서구의 여러 기술과 문화를 접하였다. 귀국 후에는 도사 번의 번주인 야마다 요시타카(山内容堂)의 신뢰를 얻어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봉건체제의 폐지와 군주제 대신 민주적 정부 구성을 주장하며, 여러 정치 단체와의 협력으로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다. 료마는 사무라이와 농민, 상인을 아우르는 폭넓은 통합을 주장하였으며, '다이쇼 우정회(大政奉還)'를 통해 권력을 다음 세대에 이양하고자 했다. 그의 활동은 당시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국론 통일과 근대화를 촉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료마의 정치적 꿈은 짧은 생애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1867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함께 일본 근대화를 이끌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료마는 1867년 도쿄에서 암살당하면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의 영향력은 이후 일본 정치사와 역사에 크게 남았다. 오늘날 타케우치 료마는 일본의 혁명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그의 업적과 사상은 여러 매체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