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롭 데르그(Crobh Dearg)는 아일랜드 신화와 민속에 등장하는 여신으로, 그 이름은 고대 아일랜드어로 '붉은 발톱' 또는 '붉은 손'을 의미한다. 그녀는 주로 전쟁, 파괴, 그리고 풍요와 관련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신격으로 묘사된다. 아일랜드의 투아하 데 다난(Tuatha Dé Danann) 신족과 연관되며, 종종 세 자매로 이루어진 삼신일체 여신의 일원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크롭 데르그는 라사르(Lasair, 불꽃)와 이냔 부이드(Inghean Bhuidhe, 노란 머리 소녀)라는 두 자매와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세 자매는 계절의 변화와 농작물의 성장 주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냔 부이드가 봄의 시작을, 라사르가 여름의 정점을 상징한다면, 크롭 데르그는 수확이 끝난 뒤 대지가 휴식에 들어가는 시기나 겨울의 도래를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름이 시사하는 '붉은' 색채는 피와 전쟁을 암시하며, 이 때문에 그녀는 때때로 바이브(Badb)나 모리안(Morrígan)과 같은 전쟁의 여신들과 동일시되거나 그들의 다른 측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녀는 전장에서의 살육과 죽음을 관장하는 한편, 특정 지역의 수호신으로서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권의 여신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녀의 붉은 손은 적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자기 집단에게는 강력한 보호와 승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크롭 데르그와 관련된 신앙은 아일랜드 서부의 코노트 지방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났다. 벨트인(Bealtaine) 축제와 관련된 민속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이는 그녀가 단순히 죽음의 여신에 머물지 않고 생명력의 순환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그녀에 대한 숭배는 성녀로 변모하거나 특정 성스러운 샘(Holy Well)과 결합하여 민간 신앙의 형태로 전승되었다.
현대 아일랜드 신화 연구에서 크롭 데르그는 고대 켈트족의 다면적인 여성 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다뤄진다. 그녀는 파괴와 재생, 죽음과 풍요라는 상반된 가치가 하나의 신격 안에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상징인 붉은색과 손의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아일랜드의 상징 체계 내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신화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