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초공작전(제4차 위교작전)은 1933년 1월부터 3월까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군이 장시성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인 중앙 소베리에트를 섬멸하기 위해 전개한 네 번째 대규모 군사 작전이다. 이전의 세 차례에 걸친 초공작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 정책을 고수하며 내부의적인 공산당을 먼저 척결하고자 약 40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했다.
국민정부군은 진청(陳誠)을 전선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진격하되 점령지에 보루를 쌓아 점진적으로 포위망을 좁히는 '분로진격, 보보위영(分路進擊, 步步爲營)' 전략을 채택했다. 이는 이전 작전에서 공산군의 유격전에 휘말려 병력이 분산되고 각개격파당했던 경험을 거울삼아, 병력의 밀도를 유지하면서 신중하게 전진하려는 의도였다.
공산당 측에서는 마오쩌둥이 1932년 닝두 회의를 거치며 군 지휘권에서 물러난 상태였으며,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실질적인 군사 지휘를 맡고 있었다. 당시 당 중앙을 장악했던 보구와 군사 고문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의 유격전 전술 대신 정면 대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실제 전장에서는 마오쩌둥이 확립한 '적을 깊숙이 유인하여 매복 공격한다'는 기동전 전략이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다. 홍군은 지형적 이점을 활용해 국민정부군의 취약한 연결 고리를 집중 타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작전의 승패는 1933년 2월 말에서 3월 초에 벌어진 황피(黃陂) 전투와 둥포(東陂) 전투에서 결정되었다. 홍군은 험준한 산악 지형에 매복해 있다가 이동 중이던 국민정부군 제52사단과 제59사단을 기습하여 괴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홍군은 수만 명의 포로와 막대한 양의 최신식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국민정부군의 주력 부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장제스는 북방에서 일본군이 열하성을 침공하는 등 대외적인 위기가 고조되자 1933년 3월 말 공식적으로 작전 중단을 선언하고 철수했다.
제4차 초공작전의 실패는 장제스에게 큰 정치적, 군사적 타격을 주었으나, 그는 이를 계기로 더욱 철저한 봉쇄 전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국민정부군은 다음 작전인 제5차 초공작전에서 수천 개의 보루를 건설하여 공산군을 압박하는 보루 전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했으며, 이는 결국 홍군이 근거지를 포기하고 대장정을 떠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반면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 작전의 승리를 두고 지도부 내에서 군사 노선에 대한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