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 ~ 1836년 9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정치가, 문인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회재(晦齋), 호는 다산(茶山)이다. 그는 조선의 실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여러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정약용은 1783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후에 정조의 신임을 받아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고종 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유배되기도 했다. 유배 생활 중에도 그는 학문과 저술 활동을 이어갔으며, 특히 농업, 수리(수리공학), 의학, 법률, 정치 이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維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이 있다. '목민심서'는 지방 행정의 기준과 도리를 제시한 작품으로, 관리의 처신 및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경세유표'는 국가 운영과 개혁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 저서로, 국가 제도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흠흠신서'는 잦은 법률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공하는 법전적인 성격을 가진 저작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의 거두로서, 그의 사상과 저술은 이후 한국의 근대화와 개혁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적이며, 주체적인 인간의 역할을 강조했다. 정약용은 19세기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학문적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