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리(圍籬)는 조선 시대 유배 형벌 중 하나인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유배보다 가혹한 처벌로, 죄인의 거주지를 특정 지점에 제한하고 그 주위를 물리적으로 봉쇄하여 자유를 박탈하는 목적을 가진다. '위리'라는 용어 자체는 가시나무 울타리를 두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울타리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된 나무는 탱자나무이다. 탱자나무는 날카롭고 긴 가시가 돋아 있어 사람이 기어오르거나 뚫고 나가기 매우 어렵다. 유배지에 도착한 죄인은 관청에서 지정한 집이나 방에 감금되며, 그 집 주위를 사람 키보다 높게 탱자나무 울타리로 겹겹이 에워싼다. 이때 가시 울타리는 집 안의 채광이나 통풍을 방해할 정도로 빽빽하게 설치되어 죄인에게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킨다.
위리안치는 주로 왕족이나 고위 관료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인물들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일반적인 유배는 일정 구역 내에서 생활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나, 위리는 가택 연금에 가까운 극도의 고립을 강요했다. 식료품은 울타리 밑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전달되었으며, 죄인은 평생 가시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며 외부 세력과의 소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이는 죄인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정치적 재기를 불가능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조선 시대에 위리안치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해군, 연산군, 조광조 등이 있다. 광해군은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어 생을 마감했으며, 연산군 역시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바 있다. 이러한 형벌은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에 정적을 제거하거나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를 격리하는 수단으로 빈번하게 활용되었다. 위리안치는 유배 형벌 중 가시울타리를 치는 형태 외에도 섬에 가두는 절도안치(絶島安置) 등과 결합하여 더욱 혹독한 형태로 집행되기도 했다.
오늘날 위리는 한국의 전통적인 형벌 문화와 유배 생활의 고통을 상징하는 용어로 남았다. 유배지에서의 고독과 한을 담은 가사나 시조 중에는 이 가시 울타리를 소재로 하여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다. 현재 제주도 추사 김정희 유배지 등 일부 역사적 장소에는 당시의 위리안치 모습을 재현해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엄격했던 형벌 제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