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파

용파(龍坡)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성안의(成安義, 1561~1629)의 호이다. 성안의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시숙(時叔)이다. 그는 영남 지방을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공직에 있을 때 청렴하고 강직한 태도로 일관하여 당대와 후세의 존경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성안의는 고향인 경상도 창녕에서 친족과 인근의 유생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그는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등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화왕산성을 거점으로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황강 전투 등에서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인해 그는 전란 중에 조정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 27) 별시 문과에 급제하며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예조 정랑, 광주 목사, 전주 판관 등을 역임하며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는 부임하는 지역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였으며, 부당한 수탈을 엄격히 금하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그의 덕망을 기려 송덕비를 세울 정도로 청백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성안의는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사후에는 그의 학문적 성취와 구국 활동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창녕의 남계서원(南溪書院)과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그의 시문과 기록을 모은 『용파집(龍坡集)』이 전해 내려오며, 이는 당시의 사회상과 의병 활동의 실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용파라는 호는 그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장소의 자연 경관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은 조선 시대 선비가 지녀야 할 덕목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표본으로 평가받는다. 평시에는 학문에 정진하고 위기 시에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오로지 백성을 위한 행정을 펼친 그의 생애는 용파라는 호와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