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침(王沈, ? ~ 266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관료이자 역사가이다. 자는 처도(處道)이며, 태원군 진양현(현 산시성 타이위안시) 출신이다. 명문가인 태원 왕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동래태수 왕유, 부친은 위나라의 안동장군 왕기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왕창의 밑에서 양육되었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문재(文才)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위나라에서 대장군 조상의 속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실각하자 함께 파직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사에게 발탁되어 복직하였으며, 사마씨 일족의 측근으로서 중용되었다. 산기상시와 시중 등의 요직을 거치며 사마소의 신임을 얻었고, 황제 조모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시강을 맡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사마씨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260년, 위나라 황제 조모가 사마소의 전횡에 분노하여 그를 처단하려 계획했을 때 왕침은 역사의 분기점에 섰다. 조모는 왕침, 왕업, 왕연을 불러 자신의 거사 계획을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왕침은 황제에 대한 충성보다 당대의 실권자인 사마씨를 선택했다. 그는 왕업과 함께 사마소에게 달려가 조모의 계획을 밀고했다. 이 밀고로 인해 조모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조모는 시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왕침은 사마소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나, 군주를 배신했다는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왕침은 역사가로서 《위서(魏書)》를 편찬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순의, 완적과 함께 집필한 이 책은 당시 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관찬 사서였다. 그러나 왕침은 사마씨 일족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거나 사마씨에게 불리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훗날 진수가 《삼국지》를 집필할 때 왕침의 《위서》를 주요 참고 자료로 삼았으나, 그 편향성 때문에 기록의 객관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서진이 건국된 후 왕침은 개국공신으로 대우받으며 표기장군에 임명되고 박릉군공에 봉해졌다. 266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경(景)이라 하였다. 그는 문장력이 뛰어나고 당대 정계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나, 권력에 영합하여 주군을 배신한 행적과 역사 기록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후대 사가들로부터 기회주의적 인물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주로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