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사

삼학사(三學士)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명의 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고 오랑캐로 여겼던 청나라와 타협하지 않는 선비 정신의 표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병자호란 발발 전, 청나라는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압박을 가해왔다. 당시 조선 조정은 현실적인 판단으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대의명분을 앞세워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척화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삼학사는 척화파의 핵심 인물들로서, 청나라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전쟁이 청나라의 승리로 끝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는 전쟁의 책임을 물어 강경하게 척화를 주장했던 인물들을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홍익한, 윤집, 오달제 세 사람은 적진으로 보내졌으며, 이후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들은 심양으로 압송되는 과정과 현지에서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조선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청나라 태종은 이들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며 자신에게 항복하고 귀순할 것을 여러 차례 회유하였다. 그러나 삼학사는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무릎은 굽힐 수 없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청나라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조선의 의리를 지켰다. 결국 1637년, 이들은 심양 성문 밖에서 처형당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삼학사의 순절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조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높은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남한산성에 현절사(顯節祠)를 건립하였으며, 평양의 무열사 등 여러 곳의 서원과 사당에서 이들의 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삼학사는 오늘날까지도 국난의 상황에서 개인의 안위보다 국가의 자존과 명분을 지키려 했던 대표적인 인물들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