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의 난은 1874년 일본 메이지 정부의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에 반발하여 사가현에서 발생한 사족(士族)들의 무장 봉기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가 폐도령과 징병제를 실시하며 무사 계급의 전통적인 특권을 폐지하자, 신분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잃은 사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는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사족 반란으로 기록된다.
반란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873년에 일어난 이른바 ‘정한론(征韓論)’ 정변이었다. 당시 조선 침략을 주장하던 정한파 인사들이 정부 내 내치 우선론자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대거 하야했는데, 이때 참의직을 사임한 에토 신페이가 고향인 사가로 돌아가 반란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사가 지역의 정한당(征韓黨)과 우국당(憂國黨)은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를 지도자로 추대하며 정부에 대항하는 무력 행사를 준비했다.
1874년 2월, 봉기한 사족 세력은 사가 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소수 관료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비판하고, 실추된 사족의 권위 회복과 대외 강경 정책 실현을 요구했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신생 국가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진압 전권을 부여하여 신속하고 강력하게 대응했다.
정부군은 서구식 화기로 무장한 상비군과 전신, 기선 등 근대적인 통신 및 수송 수단을 적극 활용하여 반란군을 압박했다. 전통적인 무장 체계와 국지적인 기반에 의존했던 사족 반란군은 정부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조직적인 병력 전개를 당해내지 못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봉기 시작 약 보름 만에 사가 성이 함락되었으며, 전세가 기울자 지도부인 에토 신페이 등은 다른 지역의 사족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도주했다.
난이 진압된 후 설립된 특별재판소는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를 비롯한 주동자 1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효수형에 처하는 등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사가의 난은 비록 단기간에 진압되었으나, 메이지 정부에 대한 전국적인 사족들의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신풍련의 난, 하기의 난 등을 거쳐 1877년 일본 최대의 내전인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족 반란의 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