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奉賈)는 후한 말기에 발생한 농민 반란으로, 주로 한족 농민들이 주도하였다. 이 반란은 184년에 시작되었으며, 역사적 배경으로는 후한 왕조의 쇠퇴, 정권의 부패, 그리고 농민의 빈곤과 압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봉기는 황건적(黃巾賊)이라고도 불리며, 이들의 상징으로는 노란 머리띠가 있었다. 이들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 '황건의 난'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황건적은 '도천서'라는 예언서를 기반으로 하여 천하를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꾸며,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에 반발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반란의 발단은 184년에 메이지 초대 황제인 헌제(獻帝)가 통치하던 시기에 발생하였다. 당시 중앙 정부는 지배 계급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농민들은 세금과 징발로 인해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의 주요 인물로는 장각(張角), 장맥(張寅), 그리고 송화(宋和) 등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혼란의 상황 속에서 반란을 지도하였다. 봉기는 빠르게 확산되어,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수많은 지역에서 반란 군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고, 대립하는 군대 간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후한 정부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여러 군대를 조직하고, 유능한 장수들을 통해 반란군과 맞섰다. 이후 유용(劉勇), 강유(彭羕), 화가(華戎) 등의 장수가 이끌어난 군대가 활동하여 봉기를 점차 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반란은 185년까지 이어졌으나, 내전과 정부의 힘의 분열로 인해 봉기는 서서히 종결되었다.
봉기의 결과는 후한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고,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반란은 삼국시대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며, 반란의 여파로 지방 세력이 대두하게 되고, 후한의 멸망을 초래하는 다양한 발전에 기여하였다.